One Battle After Another
혁명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다
by HYEOKMIN KO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
거대한 혁명보다 사소한 선택이 더 많은 것을 바꾸는 시대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One Battle After Another는 세계를 뒤흔드는 영웅담 대신, 조용한 일상 속에서 계속되는 개인의 ‘작은 전투들’을 꺼내 보인다. 실패한 혁명의 잔해 위에서 이어지는 삶, 그리고 반복되지만 멈추지 않는 변증법적 변화. 이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느 시점에 서 있는가?”
* 다수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ONE BATTLE AFTER ANOTHER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
초반에 이 영화의 제목을 그대로 말하는 밥(디카프리오)의 대사가 있지만, 제목의 의미를 어떻게 읽어낼지는 각자의 몫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 나에겐 이 제목이 [변증법]으로 읽힌다. 하나의 주장(정)에 대립하는 반대 의견(반)이 나타나고, 이 둘의 모순을 종합하여 새로운 결론(합)에 도달하는 정반합의 변증법. 다만 이 영화의 이야기는 변증법적 과정으로 역사가 진보하고 세계가 실현된다는 헤겔의 변증법과는 거리가 있다.
엄청난 리듬감의 폭풍 같은 프롤로그. 여기서 프렌치 75라는 혁명 단체가 벌이는 무장 투쟁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나고 구성원들은 이후 미국 전역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혁명가 퍼피디아는 이민자 구금소의 지휘관이었던 스티븐 록조와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때 퍼피디아는 여자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결국 출산까지 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윌라. 실패한 혁명의 유산이다.
윌라의 앳된 얼굴을 포착하는 프롤로그의 마지막 쇼트가 끝나면, 영화는 갑자기 16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후의 러닝타임에서 영화는 그 16년 동안 인물들에게 정확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거의 묘사하지 않는다. 이 16년을 기준으로 영화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영역에서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영역으로 방향을 틀기 때문에 왜 그 세월을 영화가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지는 <One Battle After Another>라는 제목을 이해하는 구조적 단서가 될 수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 감독은 21세기 혁명의 변증법이 세계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해체된 작금 세계의 혁명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핵심 동력은 여전히 개인에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는 16년의 세월을 아예 비워두고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맥락으로 극을 선회하면서 비워진 세월 동안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졌을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를 구조적으로 긍정한다. 관객은 프롤로그가 끝나자마자 경쾌한 음악과 함께 도복을 입은 채 가라테를 하는 윌라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클로즈업으로 만나게 되고, 윌라의 학교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그녀가 학교에서 잘 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감정적으로 벅차오르는 밥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지난 세월을 긍정하게 된다. 개인적 차원에서 조용하게 이루어지는 혁명. 21세기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본작이 제시하는 혁명의 변증법은 헤겔보다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비판적 사고가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칼 포퍼의 변증법에 더 가깝다. 집단으로 무장 혁명을 외치며 세상을 뒤집자는 영화가 아니라 각자 다른 상황에 처한 개인들이 그때그때 상황에 대처하면서 겪어내는 변증법적 변화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세계를 일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영화인 것이다.
2. “지금 몇 시인가요?”
이 작품에서 가장 유머러스하면서도 독특한 건 암구호에 관한 지점이다. 윌라와 조용히 숨어지내던 지난 16년의 세월 동안 밥이 암구호를 상기할 일은 없었다. 그러다 윌라가 친구들과 교내 파티에 간 사이 록조 대령과 그 일당이 윌라와 밥을 잡기 위해 그들이 사는 동네로 침투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오고 다이얼 너머의 상대방은 문득 암구호를 묻는다.
“지금 몇 시인가요?”
밥은 계속 대답에 실패한다. 16년이라는 세월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암구호에 대한 대답보다는 암구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점, 그리고 하필 록조 대령으로 대표되는 극우 파시즘이 다가올 때가 암구호를 떠올려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암구호는 지난날 실패한 혁명의 문법을 기억하고 반성하라는 의미와 동시에 지금의 세계가 최선이 아니고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진보의 꿈을 버리지 않는 태도이며, 대답하지 않더라도 존재 사실을 자각하며 이전에 품었던 희망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파편화된 개인들이 떠올려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면 몇 시냐고 묻는 영화 속의 암구호를 약간 확장해보겠다.
“우리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와있는가?”
이 질문을 본작으로 다시 끌고 오기 위해 시간을 조금 건너뛰어서 영화의 후반부로 가보자. 윌라는 이미 록조 대령에게 붙잡혔고, 수녀원에서의 친자 확인을 통해 윌라는 록조와 퍼피디아의 딸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록조는 아반티 Q라는 원주민 현상금 사냥꾼을 만나 윌라를 넘기려 하고, 그 과정에서 윌라를 1776으로 데려가라고 의뢰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다. 이마에 ‘RELENTLESS’라고 적혀있는 인물(이전 시대 사람처럼 보이지만 스마트폰을 사용 중이다.)에게 ‘Wagon Burner’라는 원주민 비하 발언을 듣게 된 아반티 Q는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윌라를 풀어주며 총으로 그곳에 상주하고 있는 모든 인물을 살해하고, 그 과정에서 본인도 사망한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직설적인 상징보다는 우회적인 플롯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능력에 있어서 동시대 최고의 감독인 PTA가 왜 일이 벌어지는 곳으로 1776이라는 직접적인 숫자를 거론한 것일까? 그리고 Wagon Burner라고 불린 아반티 Q는 왜 윌라를 살려주는가?
먼저 숫자의 의미. 1776의 숫자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건 1776년에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카 땅에 그 이전에도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연도는 1776년이다. ‘Wagon Burner’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1776년 독립 이후 미국은 서부 개척의 역사를 밟게 되는데, 이 시대의 맥락을 배경과 플롯으로 삼는 장르가 바로 서부극이다.
서부극에서 왜건은 주로 계속해서 달리고 인물들을 이동시킨다는 점에서 ‘역사의 진행 동력’을 의미한다. 그런 왜건을 태워버리는 사람은 역사의 진행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다. 아반티 Q가 Wagon Burner라는 비하 발언을 듣고 윌라를 풀어주며 ‘RELENTLESS’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을 죽이고 본인도 스스로 죽는 이 모든 행위가 1776이라는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건 지금까지 속절없이 흘러온 역사의 흐름을 멈춰 세우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에서 잔인함 대신 다른 가치를 떠올려보자는 PTA의 의도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현대의 왜건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를 윌라가 직접 운전해서 1776을 떠난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의 유산이 사라지지 않고 끝내 새로운 역사를 주체적으로 운전한다는 지점이 의미심장하다. 결국 나에게 이 영화가 던지는 최종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역사를 만들어 나갈 주체로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택할 것인가?”
3. 랑데부
러닝타임 내내 PTA의 연출력은 정말 시종일관 증명되지만, 그중에서도 후반부 카체이싱 시퀀스는 단연 압권이다. 마치 코엔 형제의 걸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플롯을 연상하게 만드는 3자 추격씬(A를 쫓는 B를 쫓는 C). 윌라를 크리스마스 어드벤처 클럽의 의뢰를 받은 스미스가 쫓고, 또 이 둘을 밥이 쫓는다. 권위주의 집단의 하수인인 스미스는 실패한 혁명의 유산인 윌라를 제거하여 자신들의 전통과 권위를 유지하려고 한다. 혁명가의 기백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밥은 그저 윌라를 구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결국 윌라가 멈춘 차에 스미스의 차가 들이받게 되고, 비틀거리며 차에서 나오는 스미스를 윌라는 총으로 죽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진 랑데부.
표면적으로는 16년을 함께해온 밥과 윌라가 다시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지난 혁명의 유산이자 앞으로의 역사를 이끌 주체가 파시즘과 권위주의를 전복시킨 후, 지금껏 개인적 차원의 혁명을 겪으며 조금씩 변모한 이전 세대의 일원을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던 여성성과 남성성의 랑데부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 중 하나임을 인식하며 권위주의를 전복시키는 여성성과 절대적인 권위가 아닌 책임과 보호를 우선적인 가치로 두는 남성성. 결국 양쪽이 모두 스스로를 일신해야 랑데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인식하기도 하고 또 멀어지기도 하는 서부의 순간들. 이 과정에서 서부의 도로는 그 자체로 역사의 경로이자 역사의 변증법이 된다. 굳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언덕 도로에서 촬영을 진행한 것도 미 서부의 그런 도로가 많이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변증법적 진행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수단이라고 여겨진다. 그 도로에서 록조 대령이 끝내 살아 돌아온다는 건 마치 역사가 진행되는 한 파시즘은 유령처럼 다시 돌아올 거라는 서늘한 예언이다. 그리고 살아돌아온 록조 대령을 굳이 독가스와 불타는 화로에서 죽여버리는 엔딩으로 PTA는 스스로가 영화의 연출자로서 리버스-홀로코스트를 설계하며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파시즘이고 이 작품이 어느 한 정치적 입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영화는 퍼피디아가 자신의 딸 윌라에게 쓴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과 함께, 그 나레이션이 끝나고 어떤 라디오 방송을 들은 윌라가 시위에 나가는 모습으로 엔딩을 맞이한다. 편지의 끝에서 퍼피디아는 윌라에게 “네가 날 찾아낼 거야”라는 말을 하게 된다. 얼핏 들으면 아주 감동적인 문구지만 다른 면에서는 꽤나 섬뜩하게 들리기도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개인적인 혁명을 이어가다 보면 세계의 일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변증법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윌라는 퍼피디아가 되고 퍼피디아는 또 다른 윌라를 낳게 된다는 예언인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장면과 가장 섬뜩한 예언이 병치되는 엔딩. 영화는 끝까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이제 영화는 끝났고 현실은 우리의 몫이다. 현실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전투를 해나갈 우리. 다시 한번 암구호 질문을 생각해 보자.
“지금 몇 시인가요?”
오늘은 앞으로 이어질 역사의 시작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택하는 가치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다. 새로운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One Battle After Another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Paul Thomas Anders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