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o Latour
우리는 결코 현대인이었던 적 없다
by modern promenader
브뤼노 라투르에 대하여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인류학자, 과학기술연구(STS)의 개척자이며, 인간과 비인간이 얽혀 세계를 구성한다는 새로운 존재론을 제시한 사상가다. 그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 근대의 이원적 사고를 비판하고, 『존재 양식의 탐구』에서 복수의 진리와 초월성의 체계를 그려내며, 철학을 “존재 양식들의 외교”라 불렀다. 현대산책자는 라투르의 사유를, 오늘 철학이 도달한 가장 첨예한 지점으로 평가하며, 그의 개념과 문제의식에 깊은 지적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세계를 해체한 철학자가 아니라, 다시 연결한 철학자였다.
근대의 신화
우리는 스스로를 ‘현대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단어의 안쪽에는 언제나 ‘근대’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가 남겨준 언어, 가치, 구분법으로 세계를 읽고 있다. 이성, 과학, 진보, 객관성, 이것들은 한때 인류가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세운 개념이었지만, 이제는 세계를 가두는 틀이 되었다.
라투르는 이 오래된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근대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신화였다. 인간은 자연과 문화를, 주체와 객체를, 인간과 비인간을 분리하여 질서를 세우려 했지만, 그 구분은 현실의 얽힘을 가릴 뿐이었다.
근대의 명료함은 착각이다
근대인은 세계를 깔끔하게 나누는 법을 배웠다. 한편에는 과학과 사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문화와 의견이 있다. 그러나 라투르는 말한다. “근대인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주장하는 바의 정반대를 해왔다.” 과학은 정치적이며, 종교는 기술적이고, 예술은 제도적이다. 모든 영역은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뒤섞인다.
근대의 명료함은 실로 착각이었다. 라투르는 이 착각을 ‘근대인의 헌법’이라 불렀다. 근대인은 분리를 믿었지만, 바로 그 분리 위에서 끝없이 혼합을 만들어왔다. 그 헌법은 모순을 덮기 위한 서사였다. 라투르는 이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우리가 근대의 경계선 바깥에서 세계를 다시 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는 일정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투르의 이 문장은 푸코가 말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한 근본적 반론이었다. 사회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제도와 기술, 언어와 물질이 끊임없이 얽혀 만들어내는 관계망이다. 도로와 미생물, 알고리즘과 법률, 사진기와 사람은 모두 행위자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얽힘 속에서 ‘사회적’인 것이 탄생한다.
사회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조립되고 해체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사회를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인간이 더 이상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의 ‘사회학’이 인간의 행위만을 다루었다면, 라투르의 사회학은 관계 자체를 다룬다.
단일한 진리는 없다
라투르는 『존재 양식의 탐구』에서 ‘진리’의 개념을 해체한다. 그에게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과학의 진리, 법의 진리, 종교의 진리, 예술의 진리, 각각의 진리는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하나의 양식이 다른 양식의 언어를 침범할 때 발생한다. 예컨대 과학이 도덕의 자리를 대신하려 하거나, 종교가 정치의 언어로 말할 때, 진리는 폭력이 된다.
라투르는 “작은 초월성들”을 말한다. 각각의 존재 양식이 자신만의 진리를 갖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때, 우리는 근대의 단일한 진리 체계를 넘어설 수 있다.
철학은 외교다
라투르에게 철학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서로 다른 존재 양식들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외교적 실천이다. 과학, 종교, 법, 정치, 예술 이 각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리를 말하지만, 때로 서로의 언어를 오염시킨다.
철학자는 이 범주 오류를 식별하고 조율하는 외교관이다. 철학은 지배가 아니라 중재이며, 통합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실천이다. 라투르가 말하는 철학은 사유의 겸손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세계를 해석하는 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조율하는 자다. 근대의 철학이 ‘근원’을 찾았다면, 라투르의 철학은 ‘관계’를 지킨다.
기술(記述)의 철학
라투르는 철학을 ‘기술(describe)’의 행위로 재정의했다. “세계를 인식하고 싶다면, 세상을 기술할 장치부터 마련하라.” 그에게 기술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위치를 정하는 행위였다. 자신이 어디에 속하고 무엇에 의존하는지 적어보는 순간, 우리는 세계 속에서의 좌표를 얻게 된다.
“당신이 의존하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라. 그것이 당신의 영토를 정의할 것이다.”
철학은 사유의 기술이며, 기술은 존재의 선언이다. 근대인은 이 기술을 잃었다. 객관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우리에게 다시 쓰기를 명한다. 너의 의존, 너의 관계, 너의 세계를 기술하라.
의존의 철학
근대는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상징되는 자율성의 신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라투르는 우리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인간은 공기와 물, 전기와 도로, 언어와 타자, 그리고 비인간적 사물들에 깊이 의존한다. 근대의 철학은 이 의존의 사슬을 감추려 했지만, 그 사슬은 언제나 우리를 지탱해왔다.
라투르는 이에 맞서 ‘의존의 철학’을 제안한다. 그것은 복종이 아니라 연결의 자각이다. 인간은 세계 위의 주인이 아니라, 세계 속의 일원이며, 근대적 자아는 해체되고 그 자리에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등장한다. 의존은 약함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복수의 존재, 다성의 세계
정치철학자 배세진은 라투르의 사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라투르는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문자 진리의 불모의 양자택일을 넘어, 복수의 진리와 복수의 존재 양식을 생산의 관점에서 사유한다.” 라투르가 거부한 것은 ‘진리의 부재’가 아니라 ‘진리의 독점’이었다. 그는 초월을 해체한 것이 아니라, 초월을 다수화했다. 대문자 초월성은 없지만, 수많은 ‘작은 초월성들’이 있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성의 합창이다. 각각의 존재는 저마다의 리듬으로 말하며, 철학의 역할은 그 합창이 충돌이 아닌 조율로 울리게 하는 일이다. 라투르의 철학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진리의 다성을 긍정하는 새로운 윤리다.
근대의 끝, 현대의 문턱에 서서
“한편으로는 다 끝난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라투르의 이 말은 근대의 종언을 선언하면서도,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시대, ‘현대’의 문턱을 가리킨다. 우리는 근대를 벗어나려 애쓰지만, 여전히 그 언어와 구조 안에 머물러 있다. 진보의 논리, 효율의 이념, 인간 중심의 세계관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한다.
라투르는 묻는다. “이제, 당신은 어떤 존재로 살겠는가?” 현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문 앞에서 서성이는 존재들이다. 근대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인간들이다. 어쩌면 ‘현대인’이 된다는 것은, 그 미완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다시 기술하는 용기를 가지는 일일지 모른다.
존재양식의 탐구, 사월의책, 황장진 번역
브뤼노라투르의 마지막편지, 이세진 번역, 배세진 검수, 복복서가
가까스로-있음, 저자 김홍중, 이음
